어느 행복한 날의 기억

그 날은 유난히 햇살이 맑고 따스했던 초여름의 어느 오후였다. 하늘은 파란 캔버스 위에 솜털 같은 구름을 몇 점 흩뿌려 둔 듯 평온했고, 내 발걸음은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온 약속을 향해 가는 사람처럼 경쾌했다. 내가 향한 곳은 오래전부터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해온 추억의 장소, 동네 뒷산 아래 작은 공원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해질 무렵까지 뛰놀던 그곳을 다시 찾는다는 생각에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공원 입구에 다다르자, 익숙한 풍경이 차례차례 눈앞에 펼쳐졌다. 벤치 주위엔 고개 숙인 라벤더들이 보라빛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오래된 회화나무는 여전한 위용으로 가지를 펼쳐 쏟아지는 햇살을 아늑하게 걸러냈다. 그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본다. 몸을 기대며 살랑이는 바람을 느끼니, 어린 시절 그토록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기억들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그때 함께였던 친구들의 맑은 얼굴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나를 환한 기분으로 물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한 친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지만, 시간이 흐르며 각자의 길을 갔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어른이 되어 돌아온 이 공원에서 다시 아이 같았다. 얼굴에 주름이 살짝 늘고,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도 더해졌지만, 눈동자 속 반짝이는 장난기와 다정한 웃음은 예전 그대로였다. 우리는 처음 본 순간 마치 어제도 이곳에서 만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잊고 지냈던 별명들을 불러주며 깔깔대는 웃음소리, 함께 뛰놀던 시절을 떠올리며 머쓱하지만 즐거운 농담들, 그리고 서로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이 달라도 변치 않은 우정의 감각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배가 출출해질 무렵, 우리는 인근의 작은 분식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녹슨 간판이 걸린 그 가게는 여전히 떡볶이와 어묵국물을 내주었고, 그 맛은 오래전 기억 속의 맛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매운 소스에 혀끝이 살짝 얼얼했지만, 옛날에도 그러했듯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 순간,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각각의 삶 속에서 겪어온 기쁨과 슬픔을 잠시 내려놓고, 단지 옆에 앉은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나누어 먹는 단순한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다시 공원으로 돌아와 앉았던 벤치에 마지막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을빛이 회화나무를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공원 한 켠에서 흩날리는 잔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날 나는 오래된 우정, 변치 않는 공간, 그리고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추억들의 조화를 통해 ‘행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그 행복은 특별히 거창하지 않았고, 비싼 물건이나 먼 여행지에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나와 같이 웃는 사람들, 눈부신 햇살, 그리고 어린 시절을 품은 오래된 벤치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발걸음은 아침보다 더 가벼웠다. 마음 깊은 곳에 예전의 소년, 소녀들이 여전히 함께 살고 있었고, 그들의 웃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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